5월 제주 여행의 단상 — 찾지 않았는데 찾아진 것들이 주는 즐거움
5박 6일이었습니다. 제법 긴 일정이라 준비도 꼼꼼하게 했습니다. 숙소는 몇 주 전부터 비교해서 골랐고, 가고 싶은 카페 리스트도 만들었고, 올레길 코스도 미리 핀을 찍어뒀습니다. 그런데 돌아오고 나서 가장 먼저 떠오른 기억들은 하나같이 계획에 없던 것들이었습니다.
아인슈페너를 찾아 헤매다 포기하고 들어간 카페, 올레길 덤불 속에서 우연히 발견한 빨간 열매들, 제주민속촌에서 처음 들어보는 이름의 메밀 한 그릇. 이 세 가지가 5박 6일의 가장 선명한 기억으로 남았습니다.
첫 번째 기억 — 아인슈페너를 포기한 날, 협재 바다가 눈앞에 펼쳐졌다
서쪽 해안을 돌던 날이었습니다. 오전부터 아인슈페너가 당겼습니다. 친구와 둘이서 협재 근처 카페들을 찾아다녔는데 이것저것 이유가 생겨서 번번이 지나쳤습니다. 웨이팅이 길거나, 주차 자리가 없거나, 이미 너무 지쳐 있거나. 결국 셋 다 포기하고 눈에 띄는 카페로 그냥 들어갔습니다.
자리에 앉고 나서야 알았습니다. 창 너머로 협재 바다가 통째로 펼쳐져 있었습니다. 에메랄드빛 바다, 흰 백사장, 수평선 위에 작고 둥글게 솟은 비양도. 야자수처럼 생긴 초가 파라솔들이 줄지어 서 있고, 사람들은 각자의 속도로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한동안 아무 말도 안 했던 것 같습니다.
📍 호텔샌드 카페 (Hotel Sand Cafe)
위치: 제주 협재해변 바로 앞 / 특징: 루프탑에서 협재해변과 비양도가 한눈에 보임 / 분위기: 초가 파라솔, 오션뷰 테라스
검색도 안 했던 곳이었습니다. 이름도 그 자리에서 처음 알았습니다. 아인슈페너는 결국 못 먹었지만, 그날의 그 뷰는 어떤 계획된 카페보다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찾아다니던 걸 포기한 순간 더 좋은 것이 나타났습니다. 여행이 종종 그런 방식으로 보상을 줍니다.
찾아다니던 걸 포기한 순간, 더 좋은 게 나타났다. 여행이 그런 것 같기도 하다.
두 번째 기억 — 올레길 덤불 속에서 발견한 빨간 열매
올레길을 걷다가 길 옆 풀덤불에서 빨간 뭔가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가까이 가보니 딸기처럼 생긴 열매가 가득했습니다. 친구가 먼저 하나 따서 입에 넣었고, 나도 따라 넣었습니다. 달고 새콤하고, 어딘가 어릴 때 맛 같은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찾아보니 멍석딸기, 혹은 멍딸기라고 불리는 종이었습니다. 제주도와 남해 쪽 야산에서 자라는 한국 자생 딸기라고 합니다. 이름은 그때 처음 들어봤습니다. 마트에서 파는 딸기와는 결이 달랐습니다. 더 작고 더 진하고, 풀 향기가 섞인 것 같았습니다.
둘이서 일정 따위는 까맣게 잊고 덤불 사이에 한참을 서 있었습니다. 손이 긁혀도 몰랐습니다. 양 손 가득 따서 입에 넣고, 또 따고. 일정표에 없던 30분이 그날의 가장 좋은 30분이 됐습니다. 이런 경험은 아무리 열심히 검색해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냥 걷다가 만나는 것입니다.
🍓 멍석딸기 (멍딸기) 정보
학명: Rubus parvifolius / 특징: 한국 자생종, 제주도·남해안 야산에서 5~6월 열매 맺음 / 맛: 새콤달콤하며 향이 진함 / 주의: 야생 열매 채취 시 먹을 수 있는 종인지 확인 필요
세 번째 기억 — 처음 들어보는 이름의 메밀 한 그릇, 비비작작면
제주민속촌 안에 식당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솔직히 기대는 없었습니다. 관광지 안 식당이라는 선입견이 있었습니다. 메뉴판을 보다가 '비비작작면'이라는 이름이 눈에 걸렸습니다.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습니다.
나오자마자 보기에도 달랐습니다. 납작하고 거친 메밀면 위에 김, 오이, 숙주, 새싹, 고기, 반숙 달걀까지 정성스럽게 올려져 있었습니다. 비빔이라는 걸 알면서도 섞기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먹어보니 고소하고 신선했습니다. 메밀 특유의 묵직한 향이 있는데 거기에 여러 재료들이 섞이면서 자꾸 손이 갔습니다. 같이 나온 만두도 담백하고 좋았습니다.
5박 6일 동안 먹은 것 중에 가장 인상적인 한 끼가 될 줄은 몰랐습니다. '비비작작면'이라는 이름, 나중에 다시 찾아봤는데 그 식당만의 이름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더 기억에 남습니다.
🍜 비비작작면
위치: 제주민속촌 내 식당 / 특징: 납작 메밀면에 다양한 고명, 메밀 특유의 고소함 / 곁들임: 만두, 깍두기 등 / 이름: 해당 식당만의 고유 메뉴명으로 추정
열심히 찾아다닌 것보다 우연히 만난 것들이 더 오래 남았다
계획을 열심히 세웠던 게 아깝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 계획들이 있었기에 그 자리에 있었을 테니까요. 협재까지 간 것도, 올레길을 걸은 것도, 제주민속촌에 들어간 것도 모두 어느 정도는 계획의 결과였습니다.
다만 여행의 진짜 맛은 계획 바깥에 있다는 것을, 이번 제주도가 다시 한번 알려줬습니다. 계획은 그 자리에 데려다주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그냥 두 눈 크게 뜨고 걷는 것입니다. 찾지 않았는데 찾아지는 것들이 주는 즐거움 — 그것이 여행을 여행으로 만드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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